<서울의 어느집> 리뷰

서울의 어느 집 정말로 사랑합니다

박찬용 에디터의 <서울의 어느 집>이란 책을 정말로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별점으로 치면 4.5점이 아니고 확신의 5점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까지 느껴지는가의 차이이다.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단순히 집을 꾸미는 얘기를 넘어서 다층적인 맥락에서 집을 들여다보는 이야기. 

 취향을 넘어,
집을 가꾸는 일의 복합적인 의미

그날따라 여름방 공기는 이불처럼 따뜻했고, 나는 그 이불 같은 여름 공기를 카트와 함께 헤쳐 나가며 내 낡은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 빈 방안 자작나무 합판 벽 앞에 의자를 놓았다. 자작나무 벽 앞에 자작나무 의자를 두니 내 눈에는 무척 근사했다. 내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그림이 내 눈앞에 그려진 기분이 이거구나 싶었다. 지난 7년간의 바보 같은 일들이 이 시퀀스를 위한 거였나, 자조와 충만이 섞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동안 창 밖에선 아침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문장을 봤을 때 어떤 마음인지 정말 정확하게 알 것 같았다. 나도 집을 가꾸면서 이런 감정을 느꼈던 그 순간을 명확히 기억한다. 두 번의 도배와 바닥 카페트 시공까지 마친 때였다. 책상을 세 번째로 되팔고 네 번째로 들였다. 인터폰 자리에 액자를 걸자, 머릿속에 수십 번 그려왔던 장면이 정확히 펼쳐졌다.

상상하던 장면이 실재하는 감각은, 짜릿하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그냥 이 시퀀스 하나를 구현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곳에 쓴 비용과 시간 모두가 납득되었다.

박찬용 에디터도 본인만의 그 시퀀스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무려 7년이나. (달려가진 않고 ‘가긴 가네’ 정도의 속도감이랄까.) 그 과정에서 ‘뭘 그렇게까지 해’ 싶은 일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들이 추천할 리 만무한 낡은 주택을 사는 첫 시작부터 그렇다. 악성 재고를 찾기 위해 온·오프라인을 도는 그 모든 과정도 그렇고. 근데 사실 이 에세이야말로 정말 ‘현실 집꾸미기’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요즘 들어 집꾸미기를 얘기하면 꼭 취향 이야기가 나온다. 집을 꾸미는 건 본인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점은 수긍이 된다. 하지만 어쩐지 취향 담론으로만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쉬웠다. 어떤 면에서는 이 얘기가 현실의 일부를 가리고 있다는 찝찝함도 있었고,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왜 꼭 디자인 영역에서의 기호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는가 싶기도 했다.

일단 아름다운 공간, 그것을 유지하는 것 자체부터가 지나치게 현실적인 문제다. 특히나 집꾸미기에 진심인 사람일수록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집 자체를 건드리고 싶고, 내가 정성스레 가꾼 집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자가가 아니면 피눈물이 난다. 취향은 있지만 자금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 구축 리노베이션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집을 거주 공간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자산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 아이러니인 셈이다.

근데 또 집은 가장 큰 사치재 중 하나 아닌가. 아무리 주거 관점에서 접근한다 쳐도 함부로 막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동네인지, 거주 형태는 어떤지, 이웃은 어떤지 등등. 어떤 집을 산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큰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나 시세 차익 목적이 아니고 주거 관점에서 집을 산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불로소득을 내려놓고 일상이 중요한 삶을 선택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기도 하다. 굉장히 중요한 의사결정인 셈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대출을 땡겨 낡은 주택을 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가가 되어 레이아웃을 고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재앙이 시작된다. 선택의 자유는 사실 축복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미 주어진 구조에 물건을 더해 집을 치장하는 것과, 레이아웃 자체를 내 마음대로 바꿔 집을 설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내가 어떤 색이나 브랜드를 좋아하는지 같은 기호를 넘어서, 나는 어떻게 공간을 구획하고 싶은지, 어떤 동선을 짜고 싶은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어떤 일상을 보내고 싶은지, 내가 원하는 주거 환경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박찬용의 이야기는 내가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긁어주었다. 나는 특히 이 이야기가 신축이 아니고 리모델링이라는 점이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모든 것을 지을 수 없다. 이미 한계가 명확하고 많은 것들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주어진 한계 안에서 오히려 우선순위를 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그려가야 한다.

내가 바라는 시퀀스, 오직 그 이상을 위해서 너저분한 현실 안에서 어떻게든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는 ‘내 집’을 구하고, 주어진 비용과 시간 안에서 바라는 조각들을 끼워 맞추어 정말 실재하는 그 시퀀스를 만들어내는 것.

녹록지 않은 현실 안에서 이 사람은 자기가 뭘 짓고 싶은지를 느리지만 생생하게 깨달아가면서, 그것을 결국 지어냈구나 싶었다. 스무 살에 상경해 8개의 방을 거치며 내가 방을 꾸며왔던 그 이유도,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이런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가 집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건, 누군가의 이런 내밀한 세계를 지어가는 이야기가 궁금해서이기 때문이구나 싶었다. 단정한 소신을 가진 이의 분투기여서 이 이야기가 사랑스럽고 좋다.

 이 책에서 발견한,
집을 바라보는 또 다른 흥미로운 시선들

  1. 공학적 맥락

ㅡ 위잉치키, 집은 거주기계

뼈를 보았으니 이제 뼈로부터 생각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집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 차례였다.

집의 핏줄. 집이라는 유기체가 돌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를 다시 깔아야 했다. 내가 느낀 한국 주거 현장에서의 인프라는 물이었다. (중략) 물길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집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정해지거나 달라지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집의 뼈]부터 [집의 핏줄]로 이어지는 구간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을 기가 막히게 지은 것 같다. 뼈랑 핏줄이라니. 마치 하나의 창조물이 만들어지는 느낌이다. 비어 있던 것에 뼈를 세우고 활기가 돌기 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분.

공학적인 측면에서 집을 바라보는 건 처음이라 신선했다. 의도와 목적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집은 확실히 거주를 위한 공간이다. 그 기능을 하기 위해 이 거대한 부품들을 하나씩 뜯어보는 시선이 재밌었다.

골격에 대한 측면은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많이 접하게 된다. 잘 보이지 않는 내장재나 내력벽 같은 것도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접근해 볼 수 있고. 하지만 사실 어떤 집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구조가 완성된다는 건 겨우 껍데기를 갖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집이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훨씬 중요한 것들이 있다. 전기가 들어와야 하고, 하수도가 연결되어야 한다. 한국 주거 환경 특성상 보일러나 난방도 생각해야 하고. 오히려 기능상으로 봤을 때 이런 것들이 훨씬 중요한데도, 그동안 한 번도 주의 깊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근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어떤 생활 공간에서 어떤 행위를 할지 결정짓는 핵심이다. 예컨대 주방의 물길을 어떻게 빼느냐에 따라 밖의 창을 바라보며 요리하는 풍경을 구현할 수도 있고, 샤워할 때 물이 잘 빠지는 등 지극히 생활 밀착적인 부분에 깊게 관여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원래도 집을 자산보다는 주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이렇게 ‘거주 기계’라는 표현까지 쓸 수 있을 정도로 공학적인 측면에서 뜯어보니 생활 환경을 근본적으로 설계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1. 기호적 맥락 

ㅡ 감도가 높다는 말 말고 기호를 설명하는 방법

  • 취향과 기호에 대해 그저 ‘미감’이라고 뭉뚱그리지 않고, 역사적 맥락 안에서 디자인을 자세하게 파헤쳐서 좋았다. ‘감도’라는 것은 분명 우열을 포함한 개념이다. 사람들은 취향이 그저 호불호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은연중에 안목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박찬용 에디터는 내가 왜 그 기호와 취향을 갖게 되었는지 디자인의 역사적 맥락을 부연하며, 그 안에서 내가 해당 기호를 갖게 된 객관적인 이유를 서술해 준다. 내가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해져서 참 좋았다.
  • 더불어 단순히 ‘예쁨’을 기준에 두지 않고, 명확한 맥락과 방향성, 그리고 의도가 있는 디자인을 공간에 들이고 싶어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오늘의집’ 같은 메가 플랫폼이 생기면서 집 인테리어에 대한 레퍼런스가 단기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머신러닝처럼 우리의 감각도 빠르게 학습되었다. 비단 소비자뿐만 아니라 공급자도 마찬가지다. 넘쳐나는 이미지 속에서 그럴듯한 외형을 섞어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일은 너무나 쉬워졌다.
  • 단순히 미감만 이야기할 때, 누군가 고심해서 만든 디자인을 너무 쉽게 모방하거나 가져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나 역시 가격의 유혹 때문에, 혹은 잘 몰라서 그런 물건들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레퍼런스의 기준조차 불명확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의도와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디자인을 소구하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에는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1. 역사적 맥락

ㅡ 세탁기 놓을 자리요? 근데 세탁기가 뭔가요.

그때 내가 고심한 부분은 세탁기였다. (중략) 세탁기의 위치라고 정해진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세대를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듯 이 집도 1971년 준공 당시의 시대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의 성격이 결핍을 통해 드러날 때가 있듯, 시대상은 무엇이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없는지를 통해서도 드러나곤 한다. 이 집에는 세탁기로 상정된 곳이 없었다.

이 집의 구조가 ‘한국형 표준 아파트 레이아웃이 생기기 전의 과도기적 레이아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런 시행착오에 매력을 느끼고, 그 시행착오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표준화된 건 집이든 뭐든 돈만 있으면 언제든 살 수 있다. 나는 그런 물건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 이 책의 부록에 ‘집은 (지나온) 시간’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도 내가 꽂혔던 부분이다. 집 그 자체가 시대상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거 문화가 어땠는지에 따라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과 구조가 달라지니까. 세탁기라는 게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다니! 가까운 미래에는 지금 당연해진 또 다른 가전들이 놓일 자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신기해할 지도 모르겠다.
  • 최근 다녀온 《집 아카이빙》 전시에서 ‘커먼즈’라는 브랜드를 보았다. 성북구 협동조합에서 진행하는 일반 분양이어서 특이했는데, 일반 아파트와 다르게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여러 구조와 평형대의 집을 선보이고 있었다. ‘국민 평형’이라고 부를 만큼 천편일률적으로 표준화된 아파트의 구조와 평형도 점차 다양해지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르겠다.
  1. 사회적 맥락

ㅡ 보이지 않아도 도시라는 인프라 안에 속한다는 것

냉장고의 용량을 생각하고 정하는 일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와 직결되는 일이기도 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큰 냉장고에 온갖 음식을 가득 채워넣고 살고 싶지 않았다. (중략) 내 손으로 물건의 무게를 느끼고, 음식이 썩어 가는 걸 오감으로 확인하며 살고 싶었다. 그런 일상을 몸으로 느끼는 게 정신적인 균형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나는 현대 사회의 성채 같은 대형 오피스텔이나 아파트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시설이 좋은 건 잘 안다. 다만 그 시설이 편리하고 안전한 만큼 나에게 실제 세상의 어떤 부분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찬용 에디터의 글을 읽다 보면, 숨겨진 것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다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느껴진다. <집의 뼈>에서 숨겨진 날것의 구조를 굳이 다 드러내 보고 싶어 했던 것도 그렇고.

어떻게 이름 붙여야 할지 고민은 되지만, 나는 이 지점이 참 좋았다. 내가 요즘 느끼는 부분과 딱 맞닿아 있어서다.

나는 지금 신축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데, 주거상 편리하긴 하지만 이상하게 ‘집다운 집’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이곳이 지나치게 ‘멸균되고’ 위생적인 공간이라 그런 것 같다. 외부의 빛과 소리, 바람, 이웃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공간. 심지어 땅으로부터도 떠 있다. (이런 곳에선 벌레 하나만 들어와도 기겁을 하게 된다. 물론 나는 벌레라면 질색하는 약한 현대인이지만.)

근데 이렇게 멸균된 공간일수록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어렵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다. 사람은 땅을 딛고 바람이랑 빛을 듬뿍 받으며 생동감 있게 살아야 건강한 법 아닌가.

집을 기능적으로 볼 때 수도나 전기 같은 ‘핏줄’이 중요한 것처럼, 사실 가장 본질적인 건 이렇게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분업화되고 고도화된 세상이라 우리는 이런 인프라를 의식도 못 한 채 살아간다. 눈에 안 보이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역으로 불편하거나 중요한 문제는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없는 셈 치고 싶은 유혹도 커진다.

하지만 음양의 조화처럼 소비가 있으면 생산이 있고, 소비는 곧 배설이 된다. 내가 무언가를 소비할 때 남는 부산물은 결국 처리되어야 할 비용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그리고 이 사회 시스템에 빚을 지고 산다.

나는 살면서 내가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감각을 온전히 느끼며 살고 싶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 뒤에 숨겨진 도시의 인프라들을 직시하고, 내가 소모하고 배설한 것들까지 마주하면서 내가 지고 있는 빚을 인지하는 것.

집이라는 건 혼자 기능할 수 없다. 동네가 있어야 하고 사회가 있어야 한다. 꼭 서로 부대끼며 살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로 이미 더불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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